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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사, 적십자회비로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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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를 위한 신문
기사입력 2017-03-02

1905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이 땅에 탄생한 대한적십자사. 가장 오랜 역사의 인도주의 운동을 펼친 국제기구의 일원이지만 대한적십자사가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051027일 칙령 제 47호로 설립된 대한적십자사는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723일 일본적십자사에 흡수 통합됐다. 98년 전인 191931일 우리나라 민족이 대한독립을 외치며 항일 운동을 펼친 날이다. 하지만 일제는 독립을 염원하던 우리의 비무장 만세운동은 일제는 무력을 사용해 잔인하고 가혹하게 진압했다. 3.1운동으로 촉발된 독립의 열망은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19194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더욱 체계화 된다.

 

한편, 임시정부를 수립한 애국지사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와의 무력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독립군의 의료보조기관으로서 전상병의 구호를 위해 적십자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안창호, 이희경 등이 중심이 되어 발기를 서두른 끝에 임시정부 발족 4개월 후인 1919829일 임정 내무부 총장 안창호의 명의로 대한적십자회 설립을 공포한다. 초대 대한적십자회의 회장은 의사인 이희경 선생이 추대됐다. 당시 명예총재는 서재필, 고문에는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문창범 등이었다.

 

 


대한적십자회의 주요사업은 상해 망명지를 위시한 중국 전역
, 한국, 러시아, 미국 등지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십자회비를 받아 독립군 부상자 치료를 위한 간호원 양성, 독립투쟁에서 부상을 입은 독립군과 그 가족의 생계 지원, 적십자병원 설립을 통한 상해 동포 진료 등이었다. 특히, 상해를 중심으로 국내와 해외 지부를 통해 모은 적십자회비는 독립운동의 재원이 됐다.

 

대한적십자회는 당시 스위스 유학생인 이관용씨를 대표로 선임해 19212월 제네바에서 열린 제10차 국제적십자회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일본적십자사에 항의서를 제출했다.

 

대한적십자회는 19199월에 3.1운동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이병철을 만나 경성 수은동 3번지에 대한적십자회 국내지부를 세웠다. 이병철은 대한적십자회 간사 및 명예회원으로 회원을 늘리고 의연금을 모았다. 당시 국내지부의 인사는 총 76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 청년층인 3.1운동 주역들이었다. 이중 여성 참가자가 45명으로 이들은 애국부인회 회원들이었다. 당시 독립운동단체인 애국부인회와 대한외교청년단원들은 적십자활동을 겸하고 있었다. 여성 중 교사, 간호사, 학생 등이 20명이었고 교사가 12명이나 되었다. 서울에서는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와 일본 동경 유학생 황에스터가 중심이 되어 적십자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19199월 국내지부가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일제는 11월부터 탄압을 시작했다. 11월 중순, 경남 창녕군의 성병진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마산일대를 돌아다니며 적십자 회원을 모집하다 경찰에 발각되어 검거되었다. 1127일 국내지부 창설에 기여한 이병철 등 10명이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고 이어 28일 전북 옥구에서도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적십자 활동을 하던 이유희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김마리아 등 애국부인회 22명이 투옥되며 고초를 겪었다.

 

192078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벌인 모험단의 수장 이석(이준용)의 체포소식이 나온다. 그 역시 대한적십자회 회원이었다. 192141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함경도 원산 출신의 김영하(金永河)와 오희영(吳熙泳)은 함흥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위반으로 각각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간도(間道)에 있는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고는 원산으로 들어와 김병제(金秉濟)에게 적십자회 가입을 권유했다는 사유였다. 바로 적십자의 활동이 독립운동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921514일 동아일보에도 황해도 장연지방에 독립운동하다 검거되어 법원 선고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온다. 사령관 장규섭과 56명은 독립을 위해 회원을 모집하고 친일파 암살과 독립운동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1920년 회원수가 2,000명에 달하고 재정의 기틀이 잡히자 대한적십자회는 1920131일 대한적십자회 총사무소에 적십자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하고 개학식을 가졌다. 간호원 양성소의 수업기간은 3개월, 매주 18시간의 수업을 들었고 학과목은 간호학은 물론 의학과목도 배웠다. 전시 의사가 부족할 것을 감안해 간호원으로 하여금 구급에 필요한 의학지식을 교육해 의사 부족을 타개하려 한 것이다. 1기 입소한 사람은 남자 3, 여자 10명으로 모두 13명이었다. 재정과 학생의 부족으로 1기생 배출에 그치고 말았지만, 한인 동포들을 위한 실질적인 의료구호 사업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1920년 상해 설립된 대한적십자회 응급구호요원 훈련수료생과 강사일동

 

그러나 대한적십자회는 1923년 국민대표회 이후 임시정부가 쇠퇴하면서 침체되었다.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국을 세워 독립군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킴으로써 독립운동은 더욱 침체되었고 적십자도 위축되었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한 뒤 1944년 중국정부로부터 800만원을 빌려 한국홍십자의원(대한의원)’이란 이름으로 병원을 설립하였고 동포들을 구제하며 대한적십자회의 명맥을 이었다. 최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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